책소개
‘동북공정’의 오류를 증명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사서
중국이 제기하는 ‘동북공정’의 주요 논리 중 하나는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인식 체계 속에서 떼어내려는 것이다. 이에 ‘동북공정’의 논리가 명백한 오류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 바로 ≪삼국사기≫다. 김부식은 신라·고구려·백제에 대한 기록을 나름대로 공평히 배분했다. 그리고 신라·고구려·백제를 솥의 세 발에 비유하면서 ‘우리나라’라는 틀 속에서 다루고 있다.
원문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삼국사기≫ 발췌본
기존에 출간된 ≪삼국사기≫는 지루한 구성, 어려운 단어, 방대한 분량 등 때문에 전체적으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번의 ≪삼국사기≫는 기존에 독자들이 다가가기 어려웠던 점을 최대한 풀어내고자 노력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되, 재미있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충분한 각주를 달아 한번 ≪삼국사기≫ 읽기에 도전해 보려는 독자가 처음 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있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발췌하려는 편중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삼국사기≫ 원전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도록 원전의 체제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발췌본이면서, 원전의 형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으로 ≪삼국사기≫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 책을 공부하는 학생, 연구자들도 볼 만하다.
200자평
≪삼국사기≫의 전체적인 체제는 그대로 살리면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했다.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논했다. 때문에 김부식의 역사학은 한국 중세 사학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사학사적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을뿐더러 원전을 읽는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지은이
고려 문종 29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까지 경주의 향리였다가 아버지 김근이 과거에 합격해 중앙 관료로 진출했다. 숙종 원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다양한 관직을 거쳤지만 주로 한림원에 근무했다. 예종 11년 문한관으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인종 즉위년에 편수관으로서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김부식이 관료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했던 때는 대내외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안으로는 문벌 귀족 간의 갈등이 노골화되었고, 밖으로는 여진의 금(金)이 압박의 수위를 높여오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종 4년(1126)과 13년(1135)에 이자겸과 묘청에 의해 반란까지 일어났다. 이때 김부식은 반란군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 그러나 정적(政敵) 윤언이와의 갈등으로 정년퇴임을 18개월 남겨둔 인종 20년 3월 관직에서 사퇴했다. 김부식은 이때부터 ≪삼국사기≫를 편찬해서 인종 23년(1145) 12월에 왕에게 바쳤다. 이후 1146년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가, 의종 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옮긴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신라 상고기 고구려 관계와 정치세력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우리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지식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강단에 섰고, ‘누군가의 등대가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외로운 학문의 길을 가고 있다. 저서로는 ≪주제별로 접근한 한국고대의 역사와 문화(공저)≫(국민대출판부, 2006), ≪신라 속의 사랑, 사랑 속의 신라-삼국시대편(공저)≫(경인문화사, 2006), ≪신라 속의 사랑, 사랑 속의 신라-통일신라편(공저)≫(경인문화사, 2008)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신라 눌지왕대 고구려세력의 축출과 그 배경>(2004), <신라 소지왕대 대고구려 관계와 정치변동>(2005), <중원고구려비의 연구동향과 주요 쟁점>(2006), <신라 상고기 대고구려 관계의 사적 의의>(2007) 등이 있다. 인터넷 다음(Daum)에 카페(장창은의 고조선과 고대사회, http://cafe.daum.net/onionjang)를 운영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삼국사기를 바치는 글(進三國史記表)
신라 본기(新羅本紀) 삼국사기 권 제1∼12
고구려 본기(高句麗本紀) 삼국사기 권 제13∼22
백제 본기(百濟本紀) 삼국사기 권 제23∼28
연표(年表) 삼국사기 권 제29∼31
잡지(雜志) 삼국사기 권 제32∼40
열전(列傳) 삼국사기 권 제41∼50
편찬자 명단
부록: 삼국의 관등표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지금의 학사와 대부들은 [중국의] 5경(經)과 제자(諸子)의 책과 진·한 역대의 역사는 혹 널리 알아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넓고 멀어 아득해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하물며 신라씨·고구려씨·백제씨가 터전을 열고 솥의 세 발처럼 서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통했기 때문에 범엽(范曄)의 ≪한서(漢書)≫와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 모두 [삼국의] 열전(列傳)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일은 자세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해서 [삼국의 기록이] 자세히 실리지 않았다.
-25쪽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벌[충남 연산]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한 채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해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불리해 사졸들의 힘이 다해갔다. [신라의] 3군이 그것[신라 측 흠순의 아들 반굴과 품일의 아들 관창의 장렬한 죽음]을 보고 비분강개해 죽을 뜻을 가지고 북 치고 고함 지르며 나아가 공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했다. 계백은 죽었고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날 정방과 부총관 김인문 등도 기벌포[금강 하구]에 도착해 백제군을 만나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12일에 당과 신라군이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고자 소부리[충남 부여] 벌판으로 나아갔다. 13일에 의자가 좌우[의 측근]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해 웅진성[충남 공주]에 [몸을] 보존했다. 의자의 아들 융과 대좌평 천복 등이 나와 항복했다.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방령의 군 등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에서 항복해 왔다.
-59~60쪽